1. 천천히 살아가는 아이
<모모>는 '시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가장 아름답고 깊이 있게 그려낸 동화다. 하지만 그 어떤 동화보다 더 철학적이고, 그 어떤 철학서보다 더 마음을 움직인다. 모모는 도시 외곽의 오래된 원형 극장에 혼자 사는 아이이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아이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듣는 능력'이다. 모모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도 지루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조용히 경청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나는 이 장면들이 현실의 일상과 너무도 닮아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늘 바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살고 있고, 때로는 자신의 말조차 스스로 들어주지 못한다. 하지만 모모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준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분명하다. 진심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함께 써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사랑의 형태라는 것.
2. 회색 신사들의 침입
어느 날, 도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신사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한다. 시간을 저축하라고. 시간을 절약해야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 말에 사람들은 친구와의 대화, 아이들과의 산책, 식사 후의 낮잠 같은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들'을 하나둘 줄여간다. 회색 신사들은 바로 '시간 저축은행'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들이 훔친 시간은 그들의 담배에 태워져 사라진다. 이 설정은 너무나도 은유적이지만, 놀랄 만큼 현실적이다. 나는 회색 신사들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가면을 쓴 자본주의, 효율성 중독, 경쟁지상주의의 은유라고 느꼈다.
그들은 시간을 돈처럼 여기게 만들고, 하루를 얼마나 생산적으로 보냈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를 판단하도록 세뇌시킨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사람들을 바빠졌지만, 관계는 끊기고 마음은 피폐해진다. 시간을 저축하려다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3. 시간을 되찾기 위한 여정
모모는 회색 신사들의 정체를 눈치채고, 그들을 쫒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 순간 등장하는 것이 '시간의 집'과 '마스터 호라'라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시간을 관장하는 존재로, 모모에게 시간을 되찾을 방법을 알려준다. 그 여정은 전형적인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 내면으로의 깊은 침잠이다. 모모는 시간의 의미를,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간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에게 '다시 사는 법'을 일깨워준다. 이 여정은 선악 대결이 아니다. 시간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그것을 조급하게 다루게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철학적 과정이다. 모모는 싸우지 않는다. 다만, '진짜 시간'을 기억하게 만들 뿐이다.
4. 아이의 눈으로 본 세계
<모모>는 아이의 눈으로 그려졌지만, 그 안의 세계는 어른들의 삶을 직면하게 만든다. 모모는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걸 원해?", "그게 정말 너의 바람이야?", "지금 이 순간 행복해?" 그녀는 이런 말들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모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책 속의 사람들은 모모에게 '말은 건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점이 너무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모는 그런 구조를 거부한다. 그녀는 세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모모는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아간다.
5. 시간을 산다는 것
<모모>를 읽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시간은 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 자원보다도 정직하게, 쓰는 대로 삶에 흔적을 남긴다. 무의식 속에서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모이면 결국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며 성격은 삶의 모양을 바꾼다. 회색 신사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강제로 시간을 빼앗기 때문인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주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알려주는 진짜 교훈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시간은 싸워서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것.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며, 그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의미 있게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라는 사실. <모모>는 이런 당연한 진리를, 아주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독자의 가슴에 심는다.
6. 마무리하며
<모모>는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모든 어른을 위한 안내서이자, 잊고 지낸 중요한 무언가를 되찾는 나침반 같은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휴대폰을 내려놓고,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계획 없는 산책을 하고 싶어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을 때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아니, 천천히 살아야만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이제야 겨우 들은 것이다. 모모처럼 조용히,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가 없었다면, 이 진실을 우리는 얼마나 더 늦게야 알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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