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리뷰

영화 <쉰들러 리스트> 리뷰 - 생명을 기억하게 한 한 사람의 결심

by 김하츄 2025. 6. 14.
반응형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포스터

1. 비즈니스로 시작된 이야기

<쉰들러 리스트>는 전쟁을 다루는 영화지만, 시작은 의외로 조용하다. 총성이 울리기 전, 화면에 먼저 등장하는 건 한 남자의 단정한 넥타이와 능숙한 미소다. 오스카 쉰들러. 그는 나치 고위 인사들과 능숙하게 어울리며, 전쟁을 '사업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는 계산적이다. 유대인 노동자는 싸게 고용할 수 있는 자원이고, 수용소는 안정적인 인력 공급처일 뿐이다. 영화 초반의 쉰들러는 오로지 수익과 관계 구축에 집중하며 움직인다. 하지만 조금씩 변해간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유대인들이 '노동력'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사연을 가진 존재임을 깨달아간다. 나는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응시할 때, 시선의 결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그의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 계속 쌓이고, 결국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그 흐름을 억지스러운 설명 없이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진실되게 느껴졌다. 쉰들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인간다움을 늦게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2. 괴물의 얼굴은 인간과 닮아 있다

쉰들러와 대척점에 선 인물, 아몬 괴트. 그는 수용소를 지휘하며 매일같이 사람을 죽인다. 이유는 없다. 때로는 심심해서, 때로는 기분이 나빠서. 나는 그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 공포는 그의 광기 때문이 아니었다. 괴트는 너무나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고, 사랑을 말하고, 밥을 먹는다. 그런데도 다음 순간 누군가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가장 섬뜩한 점은 바로 거기 있다. 감정 없이 악을 저지른다는 것. 그는 체제에 충실하고, 자신의 역할을 그저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그를 비극의 상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괴트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너무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잔혹함, 어디까지가 타인의 일일까?'

괴트의 행동은 쉰들러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같은 시대, 같은 특권을 지녔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택을 이어가는 두 사람. 나는 이 둘의 대비를 보며, 선과 악은 자질이 아니라 결정의 반복 속에서 나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

영화 전체가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선명하다. 도망치는 군중 사이를 묵묵히 걷는 그 아이. 말도 없고 표정도 거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등장한다. 시체 더미 위에 빨간 코트를 입은 채로.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쉰들러의 얼굴에 고통이 번진다. 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붉은색은 설명이 필요 없는 상징이다. 잿빛 역사 속에서 생명이 가졌던 빛깔,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감각.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나서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 아이는 이름도 없고, 대사 한 마디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관객의 마음에 남는다. 영화는 그렇게 강렬하게 '이름도 없이 사라진 존재들에게도 기억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4.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수용소의 사람들을 이름을 잃었다. 그들은 숫자였다. 관리 대상이었고, 언제든 삭제 가능한 존재였다. 그러나 쉰들러는 그들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그는 명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누가 필요한지, 어떤 기술이 있는지, 가족이 있는지. 리스트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하나를 다시 인간으로 대했다. 그 과정은 행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수행하듯이, 그는 이름을 부르고, 지켜야 할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영화 후반부, 쉰들러가 울먹이며 말한다. "이 반지 하나로 한 명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나는 영화가 현실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지금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슴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과장된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고, 관객에게 전달된 '사죄'였다.

 

5. 완벽하지 않아 더 인간적인 선택

쉰들러는 전형적인 영웅은 아니다. 초반에는 쾌락적이고, 비겁한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자기 자신을 향한 정직함이었다. 그는 변했고, 그 변화 앞에서 숨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했고, 끝내는 그 책임을 감당하려 했다. 나는 그 점에서 이 인물을 더 좋아하게 됐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는 건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어떤 감정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쉰들러는 자신이 이룬 모든 부와 지위를 내려놓고 사람을 택했다. 그 선택이 쉬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행동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영웅이란 결국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도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마무리하며

<쉰들러 리스트>는 인간이 얼마나 무뎌질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동시에 얼마나 다정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다. 가슴 한견에 무거운 돌 하나가 들어앉은 듯한 기분이 오래 남는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쉰들러의 묘에 돌을 놓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이 있었기에,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도, 그 이야기와 감정은 오래 남는다. 그것이 <쉰들러 리스트>가 가지는 가장 깊은 힘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잊지 않으려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요?"